떠남, 그리고 기억함

태백선 기차여행

바다가는길 2006. 3. 28. 18:00

태백선 열차를 탔다.

태백이니, 사북이니, 추전, 고한, 자미원, 그런 이름의 역들.

태백선 열차가 지나는 그곳들, 겨울이어서 눈이라도 덮여있었으면 모를까, 눈도 없고, 나무들은 아직 휑하니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지금은 그저 남루했다.

자연이야 언제, 어느 때건, 어떤 모습이건 늘 그런대로 나름의 아름다움과 품위를 지니는 법이어서, 높고 둥글게 솟은 산봉우리들, 나무들 잎 하나 없이 휑하니 서있어도 느긋하게 누워있는 황소 등처럼 푸근하고 넉넉해 보였지만, 거기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눈외투마져 벗어 헐벗은 모습 그대로였다.

곳곳에 드러난, 눈알이 빠진 듯 쾡하니 검은 구멍으로 뚫여있는 폐가의 창들, 무너진 지붕과 울타리, 쓰레기가 쌓인 마당, 그리고 그 가파른 산등성이 마다, 경사가 40도는 돼 보이는, 그냥 올라가기에도 힘들 것 같은 산등성이에 가꾸어져 있는 고랑 긴 밭들, 그 곳을 오르내리며 일에 열중해 있는 사람들.

기차를 타고 지나다 보니 그 지역 땅은 돌도 많던데, 그 비탈진 언덕, 파도 파도 나오는 돌덩이들을 하나 하나 치워가며 한 뙈기 밭이라도 더 일구려고 애썼을 그 손길들이 안스럽게 느껴졌다.

산골짜기 깊숙히마다 만들어져 있는 밭들에서 생존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사람들의 안간힘이 느껴졌다.

그런 사람들이 잘 살아야 하는데...

 

강원도 태백지역, 첩첩산중, 자세히 보면 산꼭대기나, 응달진 골에는 아직도 눈이, 얼음이 녹지 않아 백발의 머리를 얹고 있다.

겨울아, 너 아직 거기 있구나, 왈칵 반가운 마음.

 

한 강의 발원지라는 검룡소.

거기서 흘러내리는 물은 아직도 녹지 않은 10cm도 넘게 두터운 얼음장 밑을 소리 죽여 흐르고 있었다.

그 산길과, 그 냇가와, 얼음 밑을 흐르는 어린 봄물소리와 함께 걷는 길, 행복한 기분.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서면 정현종의 시에서 처럼 소리들도 나와 함께 걸음을 멈추어 사위가 고요해지던 그 시간, 그 순간.

빛살에 드러나는 어지러히 나는 먼지들처럼 복잡하던, 분주하던 마음이, 그 먼지 알갱이들 하나, 둘 내려앉아 고요해지고 조용해지고 투명하게 맑아지던 순간.

 

하루짜리 여행이 항상 그렇듯, 한, 두 시간 머물 곳을 찾아 일곱, 여덟 시간을 차 안에서 보냈다.

어디, 아지트로 만들 산 하나 없을까, 험하지 않고, 멀지 않고, 물소리 예쁜 호젓한 산.

그런 산 하나 찾아, 이 도시의 소리들에 마음 질릴 때 가끔 찾아가 아무 말없이, 아무 생각없이 있다 올 수 있으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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