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로스엔젤레스, 천사의 땅으로...
'instead of aquiring informations, she began to be happy...' -a room with a view-
궁형으로 휘어진, 동체각이 완만한 작은 창들이 줄이어 있고 양탄자가 깔린 바닥 위에 빈틈없이 좌석들이 들어서있다.
멀리 앞 면 영사막에선 소리 없이 영화가 상영되고 창 밖은 어둠, 기체가 규칙적으로 붕-흔들리는데, 이 어둔 공중에 떠, 넓은 바다를 건너 어디로 간다는 것, 비행기 이코노미석 한 자리를 차지하여 어둔 실내에서 홀로 등을 켜고, 앞자리 등받이에 붙은 간이탁자를 펼쳐받쳐 책을 읽고 있는 이 순간이 왜 그렇게 심상하고 당연하게 느껴지는 걸까, 마치 늘 그래왔다는 듯이...
2.14
바다, redondo beach.
하늘이 가슴 한 쪽을 열고 내보이는 심장 속으로 흰 새 한 마리 날아가는 곳...
2.15
디즈니랜드, 영원한 꿈의 동산.
2.18
비, 바다, santamonica, malibu.
이 비를 만나려고 내가 여길 왔나보다.
나 살던 곳에서 날마다 창을 열고 기다려도 오지 않던 비...
그 비를 여기서 만나려고 문득 자리 털고 일어나 오래 바다 건너, 시간을 거슬러 여행을 떠나왔나보다.
가득히, 아득히 내리는 비...
세상을 커다란 팔로 안아들고 그 품 안에 눈 감게 한다.
달콤한 숨결...
바다는 비를 만나 하늘과 하나가 된다.
바다는 하늘 끝까지 올라가 둥글게 말린 채로 저 세상 끝까지 펼쳐져 있다.
2.20
Huntington gallery
헌팅턴 일가가 자신이 살았던 집과 자신이 소장했던 예술품으로 만든 미술관.
광대하다고 표현해야 할 대지, 너무 아름답고 싱싱한 너른 잔디밭, 특색있게 꾸민 여러 정원들, 왕궁같은 저택들,..
소장된 미술품은 인쇄기가 발견되기 전 손으로 필사된 책들, 유명한 작가들의 친필 원고, 그림, 금박 입힌 식기, 세공이 화려한 가구들...
그런 것들에 감탄하면서 더 놀라는 것은 그런 정도의 부를 어떻게 오직 한 가족이 다 가지고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
2.21
'우리의 원형 어딘가에는 가벼운 데가 있다. 날개가 있다. 우리가 지상에 머물며 지탱하는 이 몸은 수증기가 되기 전의 물 같은 데 가 있다.'
세상 가득 채우며 아름다운 비 내린 후 하늘 더욱 맑아 별들이 다 외출나왔다.
서울에서 탁해진 눈빛을 여기서 반짝반짝 닦는다.
2.23
The phantom of the opera
2.27
LA county museum of art
LA의 저녁 어스름, 푸른 하늘이 깊어지고, 한 구석 카다랗게 붓질 된 흐린 구름이 어두워지고, 하나 둘 불 켜진 고층빌딩 옥상 위로 반달, 그리고 이른 별 금성.
높게 선 신호등이 기우는 햇살에 금속성으로 번뜩이며 하루의 종료를 고하는데, 미술관 높은 담장 밑에 작은 남자가 낡은 가방을 앞에 펼쳐놓고 색스폰을 분다.
그 음색은 저무는 하늘빛, 야자나무 잎을 헝클어트리며 부는 바람빛.
나무둥치를 감도는 소리는 연처럼 날아올라 어둔 하늘 구석으로 사라지고 사람들은 무심히 그 옆을 지나갈 뿐, 가방은 언제까지나 텅 비어있다.
삶에는 저런 모습도 있다. 다시 한번 만나는 외로움 하나...
3.01
비, 빗방울 하나가 빛과 만나 만드는 투명한 별.
그 별들이 모여 이루는 크리스탈 우주.
빗방울 하나가 만드는 커다란 우주.
3.02
yosemite
겨울, 어디의 것이건 산은 내게 설악산의 변주이다.
테평양 건너 여기 미국 땅, 서부의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중앙부 요세미테에서 눈 쌓인 산을 보며 나는 설악을 생각한다.
올 겨울 내가 가보지 못한 설악은 어땠을까 하고, 아, 요세미테는 마치 설악산의 두 배쯤의, 세 배쯤의 확대같구나, 하고...
산 속은 겨울이다.
하늘로부터 하늘이 쏟아져내리는 것 같이 곤두박질 치는 커다란 너울, 요세미테 폭포 앞에 서서, 그 폭포가 내뿜는 시린 숨결에 온 몸을 맡기고 서서 내가 잃었던 겨울을 거기서 잠시 만났다.
잠시 걷는 숲속 길.
마치 설악산에서와 마찬가지로, 저만치 돌아든 모퉁이에서, 그 모퉁이 돌아서 있을 세상을 궁금해하며 아쉬워하는 채로 발길 돌려야했다.
요세미테의 나무들은 참 예쁘게도 착하게도 하늘로만 곧게곧게 잘들 자라나있다.
만 년을 산다는 sequoia, 만 년을 당당히 땅에 뿌리 박고 하늘 향해 자신을 키워가는 거대한 나무는 마치 자연계의 스승, 구루같다.
요세미테, 글쎄...너를 만났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차창 너머로 잠시 바라보며 손짓한 것으로, 너의 실핏줄 사이로 투명하게 흐르는 푸름을 잠시 들었다는 것으로?
글쎄...잠시 마주친 눈빛도 만남이라면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런지...
요세미테 폭포
half dome
3.03
lake Tahoe,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손 끝 하나 닿아보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 잠시 바라만 보다왔는데...
겨울, 타호호수도 겨울 속에 누워 고요히 잠자고 있었다.
미국이 좋은 점이 있다면 그 중 하나는 넓다는 것.
언제든지 원한다면 겨울을 만나러 겨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갈 수 있다는 것.
눈 희게 쌓인 산등성이 위에 별마져 초롱해 커다란 흰눈송이들이 떠있는 것 같다.
나의 세상은 내가 보는 만큼의 넓이다.
내 마음 속에 요세미테가 자리잡고, 타호호수가 눕는다.
마음이 느끼면 그건 그대로 내 안에 들어와 내 세상의 부분이 된다.
타호, 아름다운 너, 변치말고 영원히 거기에 있거라.
3.04
Reno
창 밖이 온통 햇빛에 반짝이는 흰눈에 덮인 산등성이로 이루어진 아침.
하늘에 엷게 깔린 구름은 갓 태어난 아침의 싱그러움으로 장미빛으로 물들어있고, 그 사이로 차가운 공기 만큼이나 깨끗한 햇빛이 비추어 든다.
오전 7시. 상쾌한 아침, 드디어 비로서 진짜 여행자가 되었다.
미국의 작은 도시 리노의 변두리 호텔에 홀로 남아 택시를 기다린다.
수첩을 활짝 펼쳐놓고 글씨를 써도 누가 등 뒤에서 읽고 있을까 걱정할 필요가 전혀없는 곳.
적당한 설레임, 낯선 곳에서의 이상한 자유로움.
리노에서 샌프란시스코 가는 길
3.05
San Francisco
아침 8:30분, Fisherman's warf의 바다 쪽으로 길게 난 나무 난간 위.
하늘 꼭대기가 아니라 저 멀리 산등성이 위로부터 수평으로 펼쳐져오는 빛은 결 고운 망사에 찌꺼기 다 걸러낸 가루처럼 곱다.
나무 난간 위에 팔을 걸치고 가만히 눈을 감아보면, 고요함...
가득한 바다에 둘러싸여 마음 고요함.
햇빛 사이 사이로 흰 갈매기 날아왔다가 날아가고 끼욱대는 울음이 다가왔다가는 사라져간다.
그 사라져 간 자리로 엷은 물결이 몰려들고...
멀리 선착장에선 무언가 쇠붙이들이 부딪는 소리, 간혹 부지런한 산책객들의 웃음소리 들린다.
바다쪽에선 바다빛 연한 바람이 불어온다.
시간이 가는 것이 아깝다, 이대로 잠시만 멈추었으면...
10:30. 선착장을 지나 파도가 치는 작은 모래해변의 스탠드에 앉아 바다를 바라다본다.
바다는 한없이 맑고 푸르고 고요한 모습으로 둥글게 패인 만 안에 포근히 안겨져있다.
여기선 모두 즐거운 사람들, 모든 욕심을 버린 듯 얼굴들이 환히 빛나고, 그들의 웃음소리가 파도소리와 햇빛 사이사이에서 은사, 금사로 끼어 반짝인다.
어떻게 내가 이 시간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되었을까...
맑은 태양 아래 바다를 바라다보며 하늘 나는 하얀 새들과 나란히 앉아서, 그냥 고요히 평화롭게 내 안에 내려와 쌓이는, 그것을 뭐라고 부를까, 무언가 굉장히 포근하고 따뜻하고, 감미롭고 아름다운 어떤 충만함들을 가만히 응시한다.
1:00. Museum of Fine Arts.
붉은 모래빛, 장미빛 궁전.
한 낮의 아주 희게 표백된 햇빛도 그 안에 들어오면 단숨에 장미빛으로 물들고 만다.
온갖 새, 비둘기, 오리, 갈매기, 이름 모를 새들이, 작은 발을 서서히 움직여 헤엄쳐가는 자라와 사이좋게 함께 살아가는 연못.
사람이 다가가도 피하지않는 새들, 갈매기가 다가가도 피하지않는 물고기.
누구도 누구를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
모든 빛이 따뜻하게 장미빛으로 달구어지는 곳.
5:00. 어느 도시건 도시에는 늘 도시만의 어둠이 있다.
먼지 잔뜩 뒤집어쓰고 녹아있는, 길옆으로 치워놓은 더러운 눈더미같은 어두움, 깊은 숨 몇 만 쉬어도 기도가 새까매질 것 같은 숨막히는 어두움.
가장 성공한 자도, 가장 실패한 자도 모두 도시에 있다.
마천루의 끝이 높으면 높을수록 아스팔트 길에 깔리는 어둠이 짙다.
여기 샌프란시스코, 세계 3대 미항중 하나, 그토록 투명한 햇빛과 아름다운 바다가 있는 곳, 장난감 같은 전차가 달리고 종점에선 사람이 내려 그 전차 옆구리를 밀어 방향을 돌리고 옆에선 오르간 연주자가 그에 맞추어 신나는 연주를 하는 곳, 좁은 길 빽빽히 늘어 선 집들은 분홍, 하늘, 하양, 민트, 연노랑 같이 빛고운 얼굴을 하고 있고, 희게 칠한 창틀마다엔 레이스커튼이 나부끼는 곳.
그런데 그런 빛의 뒤에 그런 어둠이 있을 줄 몰랐다.
바닥에 거적을 깔고 앉은 수많은 거지들, 조금치의 어떤 평안이나 기쁨도 찾아볼 수 없는 무서운 얼굴들, 검고 붉은 페인트로 여기저기 낙서된 낡은 벽들, 더러운 길바닥, 내려오던 햇빛이 갑자기 빛을 잃는 곳들...
빛과 그림자가 함께 함을 늘 알고있었지만 사람들이 마음을 두고간다는 여기에서도 그런 어둠들이 산재함을 보는 것이 가슴 아프다.
어디거나 사람사는 곳은 다르지않다는 또 한 번의 씁쓸한 확인.
3.10
다시 L.A
바다. Marina Del Rey
장미빛 세상.
세상이 온통 그런 거라면...
한 올의 걱정, 근심도 없는 세상.
루른 하늘 아래 푸른 바다, 아무런 막힘없이 탁 트인 공간을 새들이 자유롭게 나는 세상.
바다, 그것이 주는 게 무엇이길래 그 앞에서 우리는 그렇게 자유로울까, 가슴이 활짝 열려 푸르러질까.
혈관의 붉은 피가 서서히 걸러져 투명한 푸르름으로 출렁이는 것 같아진다.
바다, 아름다운 세상...
3.17
Universal Studio.
대중예술의 상업성도 이 정도라면 이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중에 대한 한 봉사이다.
쇼프로그램 하나하나가 아주재미있게 잘 짜여져 있다.
한 번 보고나면 잊어버리는 오락에 불과한 영화의 한 장면 장면들을 위해 최첨단의 기술과 아이디어들이 동원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3.18
Norton Simon Museum.
여기, 미술관의 아름다운 정원.
부채꼴로 펼쳐지는 분수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그림같고, 푸른 잔디밭에 그려지는 기운 햇살에 빗겨진 나무그림자가 좋은 음악같은 곳.
크게 숨을 쉬면 폐속으로 들어오는 가득한 푸른 냄새.
안온하고 평화롭다.
Baciccio-성요셉과 아기예수
Monet-rug picker
Brancusi-A muse, Bird in space
Georges Lacombe- Autumn
미술관 정원의 양귀비
3.20
San Diego
밤, 바다가 보이는 베란다.
바다는 끊임없이 내게 다가들며 밤의 어둠에 흰 줄무늬를 그리고 있다.
파도, 소리...
파도가 그리는 흰 줄무늬를 따라 가로등 밝혀진 해변가 도로가 또 하나의 빛의 무늬를 그리고, 간혹 그리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여기 이 3층의 베란다에 앉아 별 하나없는 하늘을 가득 메우는 파도소리를 듣고있는 이 시간, 여기 있는 나는 내가 아닌 것 같다. 내가 꾸는 어떤 아름다운 꿈 속의 나의 그림자인 것 같다.
현실이 아니라 내가 아주 바라다가 꾸게 된 어떤 꿈 같게만 여겨진다.
내가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나를 그 안에 고스란히 품어주었던 시간, 그 공간들은 영원히 내 기억 속에 남을 것.
바다 옆에서 잠을 자는 밤.
이미 꿈 속에 들어와 있으므로 아무런 꿈도 꾸지 않을 밤.
3.21
검은 허공을 향해 흰 계단이 나 있다.
서너 스텝 후에 갑자기 공중에서 끊겨진 계단, 그 계단을 오르면 다다르는 곳은 어디일까.
바다는 폭풍우치는 밤, 소리가 모든 걸 휩쓸어간다.
밤, 11:30. 베란다에 나와 앉아 파도치는 소리를 듣고있다.
이 자족감. 누가 이보다 더 큰 것을 내게 줄 수 있으랴.
3.25
Santamonica
내가 기억하는 한 산타모니카엔 늘 비가 오리라.
바다는 비를 타고 허공에까지 퍼져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잇다.
비 오는 바다...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가.
모두들 모든 경계 허물고 하나가 된 세상, 비가 바다되어 출렁이며 세상을 가득 채운다.
바다를 따라 난 길을 달리며 흐린 세상 속에서 나는 하나의 섬으로 떠 하늘로부터 밀려드는 물결에 조용히 마음을 내려놓는다.
비내리는 산타모니카, 내 마음 어느 한 갈피에 머물다가 세상 메마름에 모래 위 물고기처럼 파닥거릴 때 가만히 떠올리는 기억 하나로 내 세상에 단비를 내려주리라.
4.02
사진들을 본다.
기우는 햇빛에 녹아 반쯤 투명해진 노란 양귀비, 궁형으로 휘어진 가는 꽃대 위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작은 새, 아기예수를 안고 그 얼굴을 들여다보는, 사랑으로 스스로의 얼굴 환히 빛내고 있는 성요셉을 그린 그림, 해 지고 밤이 드는 어귀, 보라빛 너울을 쓴 바다, 가로등 하나 밝혀진 부두, 비 오는 날 검게 젖은 보도 위에 서서 저만치 숲을 뒤로 하고 활짝 웃고있는 나...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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