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날개를 펄럭이며 나의 새들이 날고 있는 7월의 남녘, 푸른 들판의 초록이 눈부시다.
초록에 지쳐 단풍들 정도의 초록이 아니고, 딱딱하게 굳어 권태로운 초록이 아니고, 한창 물 오른, 생기 생명감으로 촉촉한 초록.
그 초록 논을 배경으로 길 가에 서 있는 배롱나무들이 이제 막 꽃을 피우고 있다.
'네가 푸름이 진수를 보여준다면 나는 붉음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는 듯 초록에 지지 않으려, 아니 초록에 가장 아름다운 붉음이고자 환하게 터져나온 꽃 폭죽.
배롱나무는 이름도 처음 듣고, 보기도 처음 보는데 담양의 시 나무인지 가로수가 배롱나무인 곳이 많고, 곳곳에 많이 심어져 있었다.
논의 초록과 꽃의 진분홍의 조화가 우리나라 색동의 기원이 어디인지 보여주는 것 같다.
찾아간 정자들은 소쇄원, 명옥헌, 식영정, 송강정.
모두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모습.
창호지는 찢어지고, 방구들이 썩어 있거나, 정자기둥에 고동색 조악한 페인트칠이 되어 있고, 연못은 물이 썩고 막상 연꽃 한 포기 없기도 하고.
바뀐 세월 탓에 시야를 가르는 전신주, 전선, 철책들, 귀를 괴롭히는 자동차 소음이 훼방을 놓고있다.
할 수 없이 예전에 그 정자들이 본연의 환경들을 지니고 있었을 그 모습을 상상해보며 아위움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원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들도 남아있는데, 그대로 복원해 잘 관리한다면 정말 좋을텐데...
소쇄원은 '소쇄'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의미라는데, 지금은 잘 다듬어지지 않아 좀 지저분한 느낌이다. 다만 인공정원을 만들되 기존의 자연계곡을 그대로 살려 나의 공간 안으로 들이는 자연스러움이 좋다.
애양당의 담장, 광풍각이니, 제월당이니 하는 정자들, 그 이름의 뜻을 실감할 만한 느낌을 주지 못해 원래의 '소쇄원도'를 보며 그 당시의 격조를 짐직해볼 수 밖에 없었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1530,40년 경 지은 별원.
씨족이 살던 마을이었으므로 개인의 것이라기보다 마을 공동의 정원이었을 거란다.
명옥헌은 동네 골목을 한참 지나 이르는 뒷동산 언덕에 자리잡은 정자.
1652년 무렵에 지어졌다.
정자 아래 인공연못을 꾸미고 그 안에 작은 섬을 만들어놓은 것이 인상적.
그 연못과 좁은 샛길을 사이에 두고, 연못 쪽으로 통창을 낸 별채를 지닌 집 하나, 그래서 명옥헌의 연못이 명옥헌 것이 아니라 그 별채 주인의 것 같아져버린 그 집, 대단한 아이디어.
식영정은 길가와 맞대어져 성산 언덕에 세워진 정자.
1560년경 김성원이 장인 임억령에게 지어바쳤다는 곳이다.
성산별곡의 기원지.
정자에서 보면 뒤로는 소나무 숲 울창한 성산, 앞으로는 한 낮의 뽀얀 햇빛에 낚시꾼들이 줄을 드리워놓고 한가로운 광주호와 그 풍경을 가지 사이로 슬몃슬몃 보여주고 있는 시원한 숲이 일품이다. 거기서 불어오는 바람도 좋고.
언덕 아래로는 연못을 지닌 부용당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뒷쪽으로 서하당이라는 집주인의 거처가 있다.
그 집에서 살며 연못가로, 또 언덕 위 정자로, 뒷산으로 산책다니며 공부하고, 사색하고, 시를 읊었을 그 시대 선비들의 여유와 풍류가 느껴진다.
송강정은 1584년 송강이 탄핵으로 물러난 후 내려와 지낸 곳.
그리고 저녁 어스름 무렵 찾아간 조계산 송광사.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인 승보사찰답게 규모가 크고, 특히 스님들이 많은 게 눈에 띈다.
얼굴이 맑은 한결 같이 귀티가 흐르는 젊은 스님들.
한창 재미있는 일들만 찾아다닐 혈기방장한 나이에,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걸 얻기 위해 모든 세속적 즐거움을 포기하고 단단한 마음을 먹은 그들의 다짐이 귀하게 느껴진다.
'소쇄'한 것은 소쇄원이 아니라, 송광사 마당에서 보는 조계산이야말로 소쇄하기 그지없었다.
깨끗하고 맑은 모습.
그리고 저녁 예불.
둥둥둥 울리는 법고 소리를 시작으로 운판과 목어, 그리고 서른 세 번의 범종소리와 스님들의 독경으로 맺는 예불.
그 모두가 사람이 만드는, 사람들을 위한 것임에도 왠지 그 풍경에서 사람들만이 사족, 군더더기처럼 여겨졌다.
사람만 없으면 참 완벽할 것 같은 풍경.
그 소리들에는 사불전을 들으러 모여 든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관광객들이 정말 안 어울렸기에 그 사람들을 시야에서 빼내느라 엉뚱한 먼 산과 하늘, 아니면 뒤돌아서 절 처마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신라 말,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절은 고려 때 지눌스님이 거처하면서 대찰로 커나갔다고 한다.
몇 번이나 화재로 소실돼 지금의 것들은 거의 다시 지은 것이라는데, 원래의 절의 배치를 그대로 살렸던 건지, 아니며 중창할 때마다 나름대로 재배치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과 전들의 겹침과 엇갈림들이 아름답기 그지없고, 큰 절답게 어느 한 구석 퇴색한 곳도 없을 뿐더러 비구승들만 있을텐데 누가 그렇게 세심한 지 절마당 곳 곳, 담장 옆마다 별의 별 화초와 나무들이 아기자기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참 아름다운 절.
생기발랄하고 부티나는 데다가 학승들 때문인지 기품까지 느껴지는 절.
예불이 끝나고 관광객들 하나, 둘 다 빠져나가고 스님들도 저녁공양을 위해 모여들어가 비로서 텅 비인 절 마당.
가만히 귀 기울이면 침묵의 소리, 고요의 소리가 들렸다.
거미줄로 만든 체가 있더라도 그 체에 걸리지 않을 결 고운, 입자가 곱디고운 정적.
비로서 절의 참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
아니, 비로서 내가 원하던 그 얼굴을 만나고 있는 듯한 느낌.
언제 한 번 다시 갈 곳.
개미처럼 줄 맞춰 천천히 절마당을 지나다니던 그곳의 모든 스님들, 성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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