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 그리고 기억함

화순 운주사, 쌍봉사

바다가는길 2006. 3. 28. 18:29

화순 땅, 지세가 이상하다.

남도하면 떠올리게 되는, 비옥해보이는 너른 들, 동그마니 누워있는 순한 산등성이들,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마음 편안하고 넉넉해지는그런 풍경이 아니라 이상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난삽하게 헝크러져 있다.

산들은 울뚝불뚝, 울퉁불퉁하니 무언가 그 땅거죽 밑으로 어떤 불순한 기운이, 스스로를 자제할 줄 모르는 낯설고도 푹력적인 것이 언제라도 그 거죽을 뚫고 뛰쳐나오려고 용트림하는 것 같아보이고, 사람 사는 풍경도, 논이나 밭들, 그 안에 깃든 마을도 이상하게 부산스럽고 지저분한 것이 정리가 안된 느낌, 뒤죽박죽 헝크러져 있는 쑥대머리를 보는 것 같다.

설명지를 읽어보니 광주에서 화순 넘어오는 너릿재라는 고개는 옛날엔 산적이 출몰하던 험한 길. 근세엔 갑오농민전쟁 때, 해방 후, 광주항쟁등 큰 일 때마다 양민이 학살된 곳이라니 그 불안한 지세가 묘하게 들어맞는다는 느낌.

 

운주사는 또 다른 의미에서 희안한 절이다.

운주, 구름이 머문다는 뜻인데, 나는 자꾸 구름배로 읽고 싶어지는 절.

바람 몹시 몰아치는 좁은 입구를 살짝 돌아 들어가면 탑이 잔뜩 늘어 선 협곡이 길게 이어지는데, 와, 이게 뭐지? 하는 느낌.

사람이 붐비지 않아서 인가?  몰아치던 바람이 그곳에선 잠들어 조용하기 때문인지 한적한 그 길이 어쩐지 아늑하다.

그런데 한 두개도 아니고, 크기도 제각각인, 놓인 위치도 제멋대로인, 가끔 양편 산등성이 여기 저기에도 비죽비죽이 솟아있는 돌탑들과, 얇은 판석을 잘라 조각한 거라 혼자 서있지도 못해 산비탈에 기대어져 놓여있는 역시 제각각인 불상들.

이런 걸 누가 만들었을까 싶게 신기한 모습들.

왜냐하면  탑이건 불상이건 그것을 제대로 아는 장인의 솜씨가 아니니...

그깟 것들 난들 못 만들랴, 하고 대강 곁눈으로 한 번 본 기억을 되살려 슥싹 만들어낸 듯한 솜씨니.

그래도 욕심은 있어서 제법 높다랗게도 쌓아진 그 돌탑들이나, 그저 선 몇 개 슥슥 그어 손이나 옷자락을 표현한 불상들이 그 서툴러보이는 솜씨에도 밉지가 않다.

세월에 여기저기 부서져버린, 닳아진 상처투성이 흠 많은 모습들이 나름대로 참 아름답다.

 

운주사에 관한 TV다큐를 차 안에서 보자니, 운주사 석탑들이 성좌도와 일치한단다.

북두칠성을 뜻하는 칠성바위와, 북극성 위치에 정확히 놓여져 있는 와불을 중심으로 그 주위의 별들의 위치대로 탑이 세워져 있단다.

양식 상으로 볼 때 조성시기는 고려 중기 13c전후,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설명지에는 고려 때 몽고 침입에 대항하기 위한 호국을 위한 절이었을 거라는 얘기.

천불천탑은 상징적인 숫자이고 호국을 위한 인왕도량으로 지어졌다면 통상 백불백탑이었을 거란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탑 18기, 불 70구.

이 산비탈, 저 산비탈 찾아다니며 그 탑들과 불상들 마주 앉아 오래보고 싶었는데 시간에 쫒겨 역시 급히 눈 인사만 나누고 헤어져야 했다.

독특한 절, 마음에 남는 절.

 

쌍봉사는 여러모로 운주사와 대조적인 절.

조선조까지만 해도 건물이 400여칸이 넘는 큰 절이었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대웅전, 극락전, 지장전과 요사채가 있는, 마당에 서면 한 눈에 그 전모가 들어오는 조촐한 규모이다.

절 서쪽 구석 종각 너머로 비쳐드는 저녁 햇빛에 잎파리들 온통 금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고목과 산호빛 감 조롱조롱 달린 감나무를 곁눈질하며 지장전 뒷편 대숲길을 오르면 거기 유명한 철감선사부도와 부도비가 있다.

장중하고 육중하면서도 둔해보이지 않는 몸체.

그 시대 최고의 장인이 자신이 지닌 온갖 재능을 다 발휘하여 더할 수 없는 정성으로 만들어 낸 작품.

부도는 상륜부가 없어지고, 비는 밑받침만 남고 비석은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부분들은 천 년의 세월이 믿겨지지 않게 아직 너무도 생생하게 정교한 모습 그대로이다.

부도의 받침의 연꽃 무늬, 구름무늬, 전설의 새 가릉빈가상, 몸돌의 사천왕상, 지붕은 기와 모양까지 정교하게 조각하고 기와 끝 와당의 연꽃무늬까지 새겨넣었다.

더 할 수 없는 화려함의 극치.

그러나 '화이불치'라고 하듯, 화려함에도 전혀 부박하거나 허영스럽지 않고 다만 아름다울 뿐이었다.

운주사의 탑이 소박함, '검이불루'의 극치라면 쌍봉사 부도는 '화이불치'의 극치.

두 가지가 서로 그렇게 다른데, 그렇게 다르게 양 끝에 서 있는데 둘다 그 아름다움엔 따로 우위가 없다.

 

하루 동안의 짧은 여행.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 새 날이 저물어 버리던 바쁜 발걸음.

급히 먹은 밥처럼 아직 소화가 되지 않았다.

오래오래 천천히 되씹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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