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peter greenaway

바다가는길 2006. 3. 28. 20:01

1.제도사의 계약

 

철저히 계산된 영화. 모든 것이 칼로 자르듯 면밀히 계산돼있다.

시대배경은 봉건사회의 영국, 한 17,8c쯤 되나, 한 부자의 저택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음모, 살인이 줄거리인데, 영상 한 장면 장면의 구도, 색깔, 빛의 조도와 명암이 그 주인공인 제도사가 그림 그리는, 모눈으로 나뉘어진 제도판처럼 정밀하고 치밀하다.

제도사가 한치의 오차도없이, 가감도 없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그 정확한, 명확한 풍경 속에 불확실한, 모호한 암시들이 드러난다.

사실을, fact를 정확히 볼 줄만 안다면 그 이면의 진실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건가.

한여름은 아니고 초봄도 아니고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 아주 짙지는 않되 연두빛 초록이 한창 농익고 있는 그런 계절.

너무나 푸르른 초록으로 가득 찬 고택의 정원, 흔히 보는 서양식, 철저히 계산되고 다듬어진, 만들어진 정원, 구름이 지나면서 한껏 어두워졌다가 다시 빛 밝게 드러나는 양떼 노는 초원, 그 시대상황에 맞게 촛불만으로 드러나는 음영 짙은 사물들.

영상이 어찌 그리 선명하고 명료할 수가 있나. 필림이 좋은 건지, 현상력이 우수한 건지, 또록또록한, 색의 진수가 드러나는 영상, 초록이 하도 아름다와, 초록나무 터널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의 노랑이 너무 눈부셔서 저절로 심호흡을 하게 했다.

시점의 독특함. 고택의 풍경을 12장의 그림에 담기로 한 제도사의 눈에 비치는 풍경. 제도용 투명 모눈판, 가로, 세로줄이 쳐진 사각의 판이 카메라의 view finder처럼 풍경을 선별하고 구획짓는데, 풍경과 풍경이 비친 그 제도판과 그걸 들여다보는 제도사까지를 넣고 구획짓는 실제 카메라의 시선, 이중구조다.

또 추리소설 같이 의문투성이로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스토리 전개에 마치 조롱하듯 경쾌하고도 시니컬한 음악이 '살인'이라는 무거운 주제, 살인까지 서슴치않는 인간의 욕망을 한껏 조소한다.

아마 한 팀인듯한 Sacha Vierny의 촬영과 Michael Nymann의 음악이 잘 꿰어맞춰진 레고조각처럼 서로 어울려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고있다.

 

2. ZOO

죽음에 대한 탐구.

어느 날 졸지에 자동차사고로 부인들을 잃은 쌍동이 형제가 그 뜻하지않던 죽음과 마주친 후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품고 그걸 풀어나가려하는 이야기.

동물원을 빠져나와 길거리를 헤매던 백조와 부딪쳐 차사고가 난다는 설정도 기이하고 암시적이다.

죽은 부인은 동물들을 가둬놓는 건 부당한 일이므로 풀어줘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사고의 생존자가 전한다.

동물원에서 탈출한 백조와 부딪쳐 죽는다는 것, 백조가 동물원을 빠져나왔듯, 죽음을 이 세상이라는 동물원을 빠져나가는 일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동물학자인 남편은 동물원의 동물들을 통해 죽음의 실체를 밝혀보려한다.

죽음 후에 사물이 어떻게 변화해가는지 부패실험을 한다.

사과로부터 시작해서, 새우, 물고기, 악어, 홍학, 개 , 얼룩말들을 동물원에서 몰래 빼내어 생물이 발생의 역순에 따라 부패해가는 과정들을 비디오에 담는다.

그와 동시에 죽음의 최초 원인이 되는 탄생의 과정, 지구 상에 처음 출연하는 생명체인 미생물에서 단성세포, 식물, 갑각류, 어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를 거쳐 인간이 되기까지의 진화과정을 담은 비디오가 정확히 그 해당되는 대상의 죽음, 부패와 대응하여 전개된다.

빠른 영상으로 보여지는 타일 바닥에 놓인 각종의 시체들이 썩어가는 모습.

진물이 흐르고 풍선처럼 부풀었다가 사그러들고, 구더기가 끓다가 다 쪼그라들어 뼈만 남는 과정.

영화속에선 각기 몇 십 초 정도의 영상에 불과하지만 그걸 실제 찍기 위해 짧게는 몇 일, 길게는 몇 달을 그 과정을 지켰을 테니, 와 정말 그는 지독한 사람이라는 생각.

편집증이다, 혹시 사이코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발상, 아무나 하는 건 아니다.

결국 마지막으로 사람에 대한 실험만이 남았을 때 쌍동이형제 둘은 스스로 카메라 앞에 누워 죽음으로써 실험대상이 되어 그 연구를 완성시킨다.

그 모든 것들의 죽음과 부패과정을 지켜본 후 스스로 그걸 겪기로 하는 두 사람.

어쩌면 동물원 탈출기.

그런데 그 전에 그들은 차사고에서 살아남은 여인으로부터 그들의 분신인 쌍동이 아기들을 얻어 세상에 남긴다.

그 여자는 사고로 한 다리를 절단당하는데, 하나 남은 다리를 어루만지며 두 다리의 아름다움, 무엇이든 좌, 우 대칭이 되는, 짝을 이루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결국 처음엔 쌍동이임을 감추고있던 형제가 둘, 짝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샴쌍동이로 서로 붙어 태어났을 때처럼 그렇게 서로 꼭 붙어 죽음을 같이 한다.

그들의 죽음의 뒷처리를 맡은 달팽이가 가득 찬 화면으로 영화가 끝난다.

독특한 영화. 기하학적인, 수학적인 치밀함, 퍼즐같은 수수께끼들.

한 장면, 장면, 그 장면들의 세트의 구성, 색조까지 어떤 의도에 의해 철저히 계산된 것 같다.

1.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인물들의 의상색깔도 의미를 지닌다.

갈색조의 캐주얼을 입는 올리버, 검은 양복만 입는 또 다른 쌍동이형제, 이름을 잊었다.

올리버의 방은 자유뷴방한 갈색톤, 다른 형제의 방은 모던한 흑백톤, 혹은 어두운 푸른 색, 또 검은 옷만 입는 말로라는 여인, 빨간 옷만 입는 의사의 부인, 흰옷을 입는 삐에르라는 두 다리가 절단된 남자.

여러가지 수수께끼들. 여자의 다리를 절단하여 그림 속의 여자와 같이 만들려는 의사, 동물원의 죽은 동물들을 팔아넘기는 문지기, 재봉사이면서 창녀인 검은 옷의 말로, 쌍동이의 아이를 낳는 여자,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

어쨌거나 독특한 영화, 독특한 이야기, 독특한 표현, 독특한 발상, 뛰어나다.

 

3.차례로 익사시키기-drowning by numbers

 역시 희안한 이야기.

'씨씨'라는 이름을 가진 세 여자의 남편 죽이기.

첫번째 여자는 남편의 불륜때문에, 두 번째 여자는 사업에 빠져 자신에게 무관심한 남편을, 세 번째 여자는 막상 결혼해보니 남편이 실망스러웠기 때문에.

그 외, 세 번의 죽음, 살인을 묵인해 준 장의사의 익사와 그 아들의 자살, 아들이 좋아했던 소녀의 무심한 차사고사.

그 죽음들과 병치되는 수많은 게임들, 그리고 숫자들, 처음 시작 부분에 1로 시작해서 마지막 장면, 장의사가 타고 있는 조각배의 번호 100까지.

그 외의 여러가지 장치들, 가령 달팽이, 곤충, 양떼, 달리는 사람들...

인간의 욕망,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만, 냉혹함.

살인, 죽음 따위를 다루면서도 굉장히 조소적이다.

그냥 코메디인 것처럼, 비극이어야 할 일들을 마치 의식이 마비되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 가슴에서 중요한 부분이 빠져있는 기형아처럼 고통도 조롱으로 만들어버린다.

가슴 아픈 건 소년의 죽음. 죽음을 만날 때마다 무슨 축제인냥 불꽃놀이, 축포를 쏘아대던 아이. 스스로 가장 성대한 불꽃놀이를 준비해놓고는 목을 매어버린다.

어른들은 사랑을 잃자 살인을 하고, 아이는 사랑을 잃자 자살을 한다.

여기저기 수수께끼를 던져놓은 영화. 누군가 조목조목 일일히 다 설명을 해줬으면, 하고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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