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 그리고 기억함

인제 자작나무 숲

바다가는길 2014. 2. 24. 18:42

동해안에 수십년만의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이 연일 보도됐다.

산간지역의 작은 마을들은 눈으로 고립되고 온 세상을 덮은 1m도 넘게 쌓인 눈은 치울 엄두도 낼 수 없는 지경이어 보였다.

그 지역주민들은 눈폭탄이 괴로웠지만, 뉴스를 보면서 나는 지붕이 안보일 정도로 눈이 덮여 새하얀 겨울왕국이 되버린 풍경이 그저 황홀했었다.

아, 지금 저기 좀 가봤으면...

다들 고생할텐데 이런 때 거길 놀러가기는 너무 미안한 일 아닐까 싶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와주는 게 오히려 지역경제를 위해 도움이 된다는 현지주민의 말을 빌미 삼아 당일치기로 강원도행.

며칠 전에도 강원도에는 눈이 왔었다는데 가는 길 버스 밖의 풍경은, 구석에 버려진 쓰레기봉투처럼 그늘진 곳에 겨우 희끗희끗 눈의 흔적이 남아있을 뿐 황토빛으로 메마른 모습이다.

아, 인제말고 강릉을 갈 걸 그랬나..선택을 잘못했구나 하며 눈보기를 거의 포기하고있었는데 그래도 숲에 가까이 가니 그럭저럭 눈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

본격적인 자작나무 숲은 임도를 따라 한 시간 정도를 올라야 다다를 수 있다는데, 경사가 가파르진 않아도 끝없이 이어진 오르막길이 꽤 힘들어 한 3,40분 오르다가 포기하는 바람에 자작나무숲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엔 가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산 전체 곳곳에 자작나무가 많이 심겨져있으니 여기도 자작나무숲이라고 우기면 뭐...

 

임도 중간에 쉼터가 몇 있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눈처럼 흰 자작나무들. 스스스스스... 나뭇잎 스치는 바람소리...찌지배배... 지저귀는 작은 새들의 소리... 그리고, 고요.....................................................................

이런 조용함, 이런 고요, 언제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24시간 알게 모르게 소음에 시달리는 생활. 마음 속에 풀풀 날리던 맹독의 미세먼지들이 저절로 가라앉아 흔적도없이 어디론가로 사라지는 느낌.

끊임없이 산을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의 등장때문에 그 고요를 오래 지속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짬짬히 그 시간을 아까워하며 벤치에 앉아 하늘과 나무 올려다보며 망중한을 맘껏 즐겼다.

 

고맙게도 아직 희게 남아있어준 길. 사실 이미 햇볕 닿는 곳곳은 눈이 녹아 진흙탕길이 돼있었다.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희디 흰 눈이 산을 덮고 있었다면 아무리 오르막길이 길어도 기쁘게 산길 을 올랐을 걸...

뽀득뽀득한 눈길... 아직 발바닥이 그 감촉을 기억한다.

 

 

 

 

봄의 맹공을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겨울. 죽어 마른 몸에도 온기가 있는 걸까, 잎파리 모양으로 얼음이 녹는다.

 

 

 

 

집으로 돌아온 저녁 새들이 지난 가을 채 떨어지지않은 잎인냥 가지끝에 조롱조롱 달려 하루동안의 일들을 지지배배 거리며 털어놓고있다.

내가 사박사박 걸어들어갔다가 걸어 나온 길. 짧은 시간이었지만 겨울과의 마지막 조우.

사진은 기억의, 시간의 저장고. 이렇게 사진으로 그 시간속으로 되돌아간다.

이번 겨울엔 눈 한창일 때 제대로 자작나무숲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