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라야마 부시코

바다가는길 2006. 1. 22. 01:37

나라야마 부시코 포토 보기나라야마 부시코 楢山節考 The Ballad of Narayama 일본 1999-10-09 감독:이마무라 쇼헤이

 

 

토코니지와 마사오 촬영. 이케네 신지로 음악.

촬영장소가 어딜까. 우리나라와 산세가 많이 비슷하다. 친근한 풍경.

 

이 작가는 우리나라로 치면 임권택일 것 같다.

꽉 짜여진 빈틈없는 서술구조, 정일성 감독의 촬영처럼 철저히 빛과 구도가 계산된 정교하게 아름다운 영상.

 

동물들의 세계와 중첩돼 보여지는 인간사회의 모습.

그래, 과연 절대윤리란 것이 있을까, 절대선이나 절대악이라는 것이 있을까.

집단을 이뤄 살게 된 인간. 그 집단의 생존에 유리한 것이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선이고, 집단생존을 위협하는 것이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악이다.

윤리란, 도덕이란 그런 집단의 생존을 위해 인간들 스스로 만든 규칙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언제, 어느 때라도 변하지않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할, 변해야만 하는 게임규칙.

 

식량이 부족한 산골, 집단의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도둑질이 가장 큰 죄가 되어 도둑질한 사람을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생매장해 살해해도 그것이 죄가 되지않고, 먹을 입을 덜기 위해 누구나 일정 나이가 되면 스스로 산 속으로 죽으러 가는 것이 가장 명예로운 행동이 된다.

늙은 부모를 버리는 것이 파렴치한 죄가 아니라 당연히 해야할 도리가 된다.

그건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선책으로 선택된 윤리겠지.

인간이 농경을 시작해 식량을 대량생산하기 전까진 영아살해가 다반사였다니까.

 

감독이 끊임없이 인간행동들을 동물과 대비시키는 것처럼, 아니 병렬시키는 것처럼 인간도 아직은 너무 많이 동물인 것 같다.

아니, 너무 많이, 가 아니라 거의 동물이겠지.

무엇으로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별해낼 수 있을까.

살고싶은 욕망, 삶에의 애착을 끊고 스스로 죽음을 찾아나서는 일, 살만큼 다 살고서도 죽지않으려 발버둥치는 대신 담담히 죽음을 찾아가는 일, 그렇게 자신의 삶을, 그리고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의지?

동물은 죽음에게 선택당하지만 인간은 감히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허나 생각해보니 동물들이야말로 죽을 때가 되면 스스로 무리를 떠나 순하게 죽음을 준비한다. 오히려 때가 왔음에도 아둥바둥 죽음을 피하려 애쓰는 건 인간이다.)

 

삶에 패배하여 택하는 죽음이 아니라 한껏 잘 살고 난 후 그 마무리까지 스스로 마치기 위해 선택하는 죽음이 숭고하게 느껴진다.

그렇지, 나고 사는 것만큼이나 죽음도 삶의 과정인 거지 뭐 유별난 것이 있을까.

 

실제로 이빨을 부수며 연기했다는 어머니역의 시카모토 스미꼬, 어머니를 버려야하는 아들의 고뇌를 잘 표현한 오가타 켄, 거의 동물로서의 인간을 보여준 작은 아들역의 배우, 또 산촌의 모습을 그대로 꼼꼼히 재현한 세트, 누덕누덕한 쪽빛 나염의 의상들...

어느 한 가지, 한 구석 소홀함없이 정성을 다 기울인 영화인 것을 알겠다.

오랜만에 보는 좋은 영화. 그 아득하던 설경이 아직 마음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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