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증이며 샘물인-정현종

바다가는길 2006. 2. 5. 15:47


갈증이며 샘물인
정현종
문학과지성사

 

'자연은 왜 위대한가/왜냐하면/그건 우리를 죽여주니까/마음을 일으키고/몸을 되살리며/하여간 우리를/죽여주니까'

                            -자연에 대하여-

 

 

못 알아들을 말, 하나도 없다.

그가 보았던 것 나도 보았고, 내 마음 속에 담겼던 것들이 그에게도 갔었다.

갈증이어도 목마르지 않고, 샘물이어도 넘치지 않았다.

 

 

 

 

날개

 

 

향나무 꼭대기 가는 가지 끝에 앉아있는 작은 새가 바람에 막 흔들리는 가지와 함께 막 흔들리고 있다. 흔들리는 것도 두렵지 않고 떨어지는 것도 무섭지 않다. 날개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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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오늘 밤은 없다

달력에 없다!

달력에 없는 오늘 밤!(흥분하지 말아야지)

나는 날을 찾았다(달력이 생긴 이래 잃어버린 날들)

춤추는 무한은 취해 있느니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의 일들은 없다

 

나는 남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고

다른 여자와 잘 수 있으며

내 몫을 어느덧 챙길 수 없고

열린 척도가 과일 향기처럼 퍼진다

몸은 만물에 돌아가 가이없고

마음은 대공한 크나큰 숨결

 

시간이여

달력에 없는

저 개화의 한 없는 피어남에서

오늘 밤을 구해내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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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람결

 

 

이 바람 속에는

모든 게 다 들어 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모처럼 맑은 이

바람 속에는---

 

어디서 눈이 트고 있다

이 바람결,

살어리 살어리

이 바람결,

포르르 포르르

이 바람결.

허공의 살이네

이 바람결.

멀리 멀리 퍼지는 이 몸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물들어

자세히 봄비는 이 몸.

오 붐비는 숨결

이 바람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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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여 꽃이여

 

 

새가 울 때는

침묵

꽃이 피어

무언

 

새여

너는 사람의 말을 넘어

거기까지 갔고

꽃이여

너는 사람의 움직임을 넘어

거기까지 갔으니

 

그럴 때 나는

항상 조용하다

너희에 대한 찬탄을

너희의 깊은 둘레를

나는 조용하고 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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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움직인다

 

 

몸을 여기서 저기로 움직이는 것

몸이 여기서 저기로 가는 건

거룩하다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가까운 데 또는 멀리

움직이는 건

거룩하다

삶과 죽음이 같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욕망과 그 그림자--슬픔이

같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나와 한 없이 가까운 내 마음

나에게서 한 없이 먼 내 마음이

같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바깥은 가이 없고

안도 가이 없다

안팎이 같이 움직이며

넓어지고 깊어진다

 

몸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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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가에 멈춰 서서

 

 

내 일터 손바닥만한 숲

포장한 길을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섰습니다

(그러고 싶어 그랬겠지요)

내가 움직일 때는 나무들도 움직였군요.

멈춰 서자 나무들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정적 일 순 ---

아주 잘 들렸습니다 그 고요,

부동이 만들어 내는 그

고요의 깊이에 빨려들었습니다

없는 게 없었습니다

광막하고 환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의 미덕이

쟁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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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와 공간의 숨결이여

 

 

내가 드나드는 공간들을 나는 사랑한다

집과 일터

이 집과 저 집

이 방과 저 방,

더 큰 공간에 품겨 있는

품에 앉겨 있는 알처럼

꿈꾸며 반짝이는 그 공간들을

나는 사랑한다.

꿈꾸므로 반짝이고

품겨 있으므로 꿈꾸는

그 공간들은 그리하여

항상 태어 날 준비가 돼있다.

항상 새로 태어나고 있다.

어리고 연하고 해맑은

그 공간들의 태 내에 나는 있고

나와 공간들은

서로가 서로를 낳는다

서로 품어 더욱 반짝여

서로가 서로를 낳는 안팎은

가없이 정답다

그 공간들을 드나드는 때를 또한

나는 사랑한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

그 모든 때는 태초와 같다.

햇살 속의 먼지와도 같이

반짝이는 그때의

숨결을

나는 온 몸으로 숨 쉬며

드나든다, 오호라

시간 속에 비장되어 있는 태초를

나는 숨 쉬며

드나든다

모든 때의 알 또한

꿈꾸며 반짝이며

깃을 내밀기 시작한다

시간이란 그리하여

싹이라는 말과 같다

시간의 태가 배고 있는 모든

내일의 꽃의 향기를

그 때들은 꽃 피운다

 

내가 드나드는 공간들이여

그렇게 움직이는 때 들이여

서로 품에 안겨

서로 배고 낳느니

꿈꾸며 반짝이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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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이 걸어가듯이

 

 

시간은 흘러,

흐르는 시간

쓸쓸하여,

마음 안팎을 물들여,

가을 바람이 나무를 흔들듯이

내가 말 없이 걸어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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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그리고/마음은 춤춘다, 아름다움이여!'

 

'저 꽃들,/그냥 피어나고/또 피어나고/ 이 세상의 온 갖 색깔을 춤추는 /계절과 햇빛의 고향'

 

'바라보면 항상 이쁜/이쁘고 나서 또 이쁜'

 

'맑은 공기 향기로운 흙/눈 가는데 산과 하늘/사과꽃 복사꽃,/아무 것도 서두를 게 없고/서두르는 것도 없으며/서둘러 말할 것도 없다/마음은 떡잎과 같다/ 이게 시간이다'

 

'새들아, 산 하늘들아/ 나무야, 하늘의 숨결아/ 너희의 깃을 나는 사랑하고/ 너희의 가지들을 나는 한 없이 / 사랑하거니와/그리고/그리고 말이다/ 나는 언제나 너희 깃 속에 깃들여/ 나는 언제나 너희 가지에 깃들여/ 너희의 성장과 비약에 합류/너희의 그 아무도 몰라 이쁘고 이쁜 꿈에 합류하거니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