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바다가는길 2006. 2. 4. 01:23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오규원
문학과지성사

 

'세계를 읽는 데는 사실을 사실로 읽을 수 있는 시각이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실들이 서로 어울려 세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떤 현상에서 눈에 보이는 사실보다 더 무겁고 충격적인 심리적 총량으로서의 사실감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세계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가슴이 붉은 딱새-에서

 

위의 글 그대로.

흔히 보는 물상들, 집, 새, 돌, 꽃, 나무, 하늘, 길, 담, 사람...그런 것들을 그냥 보이는대로 적어놓는데도, 시 속에서 그들이 서로 어울려 있는 그 세계가 너무도 선연히 떠오르고,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보이는 세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 보이는 세계보다 훨씬 질량이 높아진 '심리적 총량으로서의 사실감'이 느껴진다.

내가 직접 그 세계를 읽어내지는 못할지라도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면 그 세계가 보였다.

아니, 이 말은 틀린 것 같다.

그는 흔히 보이는 물상들을 얘기하되 그 물상의 이면, 사람들이 보아내지 못하는 부분을 꼬집어낸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들이 흔한 돌멩이나, 꽃, 나무에 관한 것일지라도 아주 신기롭게 느껴지는 것 같다.

 

시다운 시답게 이미지의 도약이 상큼하다.

도약은 아닌가? 관습적 시선이라는 두터운 묵은 때를 말끔히 벗은 물상 본연의 이미지를 되찾을 뿐인가?

아주 천천히, 머리 속에다 그가 이름 부르는 그 사물들을 하나 하나 살려내어 그가 지시하는대로 적절히 배치해가며 하나의 총체적 화면을 다 만들고 보면, 와...!

뭐라고, 왜라고 말로 하기는 어려워도 그 적막하고 고요하고 정갈한 느낌에 마음의 대기가 맑아진다.

 

 

 

 

하늘과 돌멩이

 

 

담쟁이 덩굴이 가벼운 공기에 업혀 허공에서

허공으로 이동하고 있다.

 

새가 푸른 하늘에 눌려 납작하게 날고 있다

 

들찔레가 길 밖에서 하얀 꽃을 버리며

빈 자리를 만들고

 

사방이 몸을 비워놓은 마른 길에

하늘이 내려와 누런 돌멩이 위에 얹힌다.

 

길 한 켠 모래가 바위를 들어올려

자기 몸 위에 놓아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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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과 그림자

 

 

장미를 땅에 심었다

순간 장미를 가운데 두고

사방이 생겼다 그 사방으로 길이 오고

숨긴 물을 몸 밖으로 내놓은 흙 위로

물보다 진한 그들의 그림자가 덮쳤다

그림자는 그러나

길이 오는 사방을 지우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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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과 비비추

 

 

식탁 위 과일 바구니에는

포도 두 송이

오렌지 셋

그리고 딸기 한 줌

 

창 밖의 파란 하늘에는

해가 하나 노랗게 물러 있고

 

식탁 위 과일 바구니에는

주렁 두 개와

둥글 셋

그리고 우툴 한 줌

 

창 밖의 뜰 한 쪽에는

비비추

꽃이 질 때도 보랏빛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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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돌

 

 

떡갈나무를 산기슭에 두고

길은 낮은 지상으로 풀리고 있다

낮은 지상에서도

돌들은

하나 둘

아니

하나 둘 셋

있다

산 밑에는 언제나 산을 파고 있는

길이 있다 산 밑에서도 사람 하나

길에 묻히고

아카시아를 중심으로

새 한 마리 허공을 나누다가

급히 하강하고

다른 새 한 마리는 위로 솟구치다가

어느 새 하늘이 되었다

사내는 낮은 길에 서서 몸을

바로 세운다 길이

앞 뒤로 나누어지며 툭 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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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나

 

 

칸나가 처음 꽃이 핀 날은

신문이 오지 않았다

대신 한 마리 잠자리가 날아와

꽃 위를 맴돌았다

칸나가 꽃대를 더 위로

뽑아올리고 다시

꽃이 핀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음 날 오후 소나기가

한동안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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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물과 나

 

 

7월 31일이 가고 다음 날인

7월 32일이 왔다

7월 32일이 와서는 가지 않고

족두리 꽃이 피고

그 다음 날인 33일이 오고

와서는 가지 않고

두릅나무에 꽃이 피고

34일, 35일이 이어서 왔지만

사람의 집에는

머물 곳이 없었다

나는 7월 32일을 자귀나무 속에 묻었다

그 다음과 다음 날을 등나무 밑에

배롱나무 꽃 속에

남천에

쪽박새 울음 속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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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자리

 

 

며칠 동안 멧새가 긴 개나리

울타리 밑을 기고 깝죽새와

휘파람 새가 어린 라일락 가지와

가지를 옮겨다니더니

오늘은 새들이 하늘을 살며

뜰을 비워놓았다

그 사이 단풍나무는

가지 끝과 끝에서 잎이 뾰족해지고

감나무는 잎이 동글동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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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별

 

 

밤이 세계를 지우고 있다

지워진 세계에서 길도 나무도 새도

밤의 몸보다 더 어두워야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더 어두워진 나무는 가지와 잎을 지워진

세계 위에 놓고

산은 하늘을 더 위로 민다

우듬지 하나는 하늘까지 가서

찌그러지고 있는 달을 꿰고 올라가

몸을 버티고 있다 그래도 달은

어둠에서 산을 불러내어

산으로 둔다 그 산에서

아직 우는 새는 없다

산 위에까지 구멍을 뚫고

별들이 밤의 몸을 갉아내어

반짝 반짝 이 쪽으로 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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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길

 

 

허공에서 생긴

새들의 길은

허공의 몸 안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몸 안으로 들어 간

길 밖에서

다른 새가 날기도 하고

뜰에서

천천히 지워질 길을

종종종

만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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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루비아와 길

 

 

사루비아를 땅에 심었다 꼿꼿하게

선 그 위에 둥근 해가 달라붙었다

사루비아 옆은 여전히 비어 있어

모두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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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새

 

 

봄입니다 그리고

4월입니다

 

목련꽃이 피자 꽃몽오리에 앉았던 햇살이

꽃봉오리에서 즉각 반짝 하고 빛났습니다

 

목련꽃이 지자 이번에는 햇살이 꽃이 진 자리에

매달려 새 잎을 불러내고 있습니다

 

목련꽃이 지고 꽃이 진 자리에 잎이 날 동안

목련꽃 곁의 울타리에서는

 

몽오리를 만들고 있던 개나리가 노오란

꽃을 불쑥 내밀었습니다

 

순간 꽃몽오리에서 밀려났던 햇살이 반짝하더니

다시 꽃봉오리에 와아아-붙었습니다

 

개나리 울타리 밑에서는 민들레가

개나리와 같이 노오란 꽃을 만들고

 

양지 쪽 울타리 밑에서는 흙더미 위로

이제 겨우 채송화가 머리를 뾰족 내밀었습니다

 

그래도 성급한 벌들이 가끔 그 위를 날고

개미는 뾰족한 채송화 머리 사이로 걸음을 옮깁니다

 

아, 물론, 새들은 꽃 피고 잎이 돋을 동안

꽃몽오리와 잎을 피해 나뭇가지에 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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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콩덩굴과 아이

 

 

엉겅퀴를 지나면

명아주를 지나야 하는 길입니다

 

수영을 지나면

여뀌를 지나야 하는

 

뱀딸기를 지나면

메꽃을 밟아야 하는

 

매듭풀을 들치면

갈퀴덩쿨을 지나야 하는

 

새콩덩굴이

새콩덩굴을 감아야 하는 길입니다

 

방가지 똥을 지나면

괭이밥을 밟아야 하는

 

잠자리가 문득

새콩덩굴을 밟아야 하는

 

한 아이가 문득

멈추어야 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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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물과 높이

 

 

밤새 눈이 온 뒤 어제는 지워지고 쌓인 흰 눈만 남은 날입니다

쌓인 눈을 위에 얹고 물물이 허공의 깊이를

물물의 높이로 바꾸고

나뭇가지에서는 쌓인 눈이 눈으로 아직까지 그 곳에 있는 날입니다

뒤 뜰에 붙은 언덕의 덤불 밑에는 오목눈이와 멧새와 지빠귀와

그리고 콩새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먹이를 찾고

새들이 먹이를 삼킬 때마다

덤불 밖의 하늘이 꼬리 쪽으로 자주 기우는 날입니다

직박구리 한 쌍이 마른 칡덩굴이 감고있는 산수유에 앉아

노란 꽃이 진 자리에 생긴 붉은 열매를 챙기고

열매가 사라진 자리에는 허공이 다시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날입니다

그러나 콩새 한 마리가 급히 솟구치더니

하늘에 엉기고 있는 덩굴을 빠져나와 동쪽을 가서는

몸을 그곳의 하늘에다 깨끗이 지우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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