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바다가는길 2006. 2. 27. 22:14

[도서]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 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거리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두 사람만의 아침

 

 

나무들 위에 아직 안개와

떠나지 않은 날개들이 있었다

다하지 못한 말들이 남아

있었다 오솔길 위로

염소와 구름들이 걸어왔지만

어떤 시간이 되었지만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나는, 여기 이 눈을 아프게 하는 것들

한때 한없이 투명하던 것들

기억 저편에 모여 지금

어떤 둥근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들

그리고 한 때 우리가

빛의 기둥들 사이에서 두 팔로

껴안던 것들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한때 우리가 물가에서

귀 기울여 주고 받던 말들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고

 

새와 안개가 떠나간

숲에서 나는 걷는다 걸어가면서

내 안에 일어나는 옛날의 불꽃을

본다 그 둘레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숲의 끝에 이르러

나는 뒤돌아 본다.

 

 

 

 

꽃등

 

 

누가 죽었는지

꽃집에 등이 하나 걸려 있다

꽃들이 저마다 너무 환해

등이 오히려 어둡다. 어둔 등 밑을 지나

문상객들은 죽은 자보다 더 서둘러

꽃집을 나서고

살아서는 마음의 등을 꺼버린 자가

죽어서 등을 켜고 말없이 누워 있다

때로는 사랑하는 순간보다 사랑이 준 상처를

생각하는 순간이 더 많아

지금은 상처마저도 등을 켜는 시간

 

누가 한 생애를 꽃처럼 저버렸는지

등 하나가

꽃집에 걸려있다

 

 

 

 

비로 만든 집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안개로 만든 집

구월의 오솔길로 만든 집

구름비나무로 만든 집

 

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들

 

세상이 슬픔으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의 새가 세상의 지붕 위를 날고

비를 내리는 오솔길이 비의 나무를 감추고 있는 곳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비의 새가 저의 부리로

비를 물어 나르는 곳

세상 어디로도 갈 곳이 없을 때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들

 

 

 

 

지상에서 잠시 류시화라고 불리웠던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올리고

별들이 내린 강을 건너다가

그만 별에 발을 찔렸습니다

지금은 집에 돌아와

그 옛날 내가 떠나온 별에게

긴 편지를 씁니다 어떤 영혼은

별에서 왔다는

별에서 와서 고독하다는

그 말을 내 집 지붕에 얹어둡니다

이 짧은 지상의 삶과는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나는 잊지 않았습니다

내가 띄운 편지가 그 별에 가 닿았는지

내 집 지붕 위에서 별 하나가 흔들립니다.

 

 

 

 

물안개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겁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여행을 위한 서시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을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순간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던 일도 그만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 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 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 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나무의 시

 

 

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먼저

눈을 감고

나무가 되어야지

너의 전 생애가 나무처럼 흔들려야지

해질 녘 나무의 노래를

나무 위에 날아와 앉는

세상의 모든 새를

너 자신처럼 느껴야지

네가 외로울때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너의 나무가 서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그리하여 외로움이 너의 그림자만큼 길어질 때

해질 녘 너의 그림자가 그 나무에 가 닿을 때

넌 비로서 나무에 대해 말해야지

그러나 언제나 삶에 대해 말해야지

그 어떤 것도 말고

 

 

 

 

하얀 것들

 

 

날개

물 위에 뜬 빛

어린 시절의 기억

외로운 영혼

죽음 뒤에 나타나는 빛의 터널

자작나무의 흰 껍질

강의 마른 입술

오래된 상처

사막은 무슨 생각을 하며

하얗고 긴 생을 견디는 걸까

 

여기 하얀  것들이

내 곁에 있다

 

오래 된 상처

강의 마른 입술

자작나무의 흰 껍질

죽음 뒤에 나타나는 빛의 터널

외로운 영혼

어린 시절의 기억

물 위에 뜬 빛

날개

 

 

 

 

눈물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이 환하다

누가 등불 한 점을 켜 놓은 듯

노오란 민들레 몇 점 피어 있는 듯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민들레 밭에

내가 두 팔을 벌리고

누워 있다

눈썹 끝에

민들레 풀씨 같은

눈물을 매달고서

눈을 깜박이면 그냥

날아갈 것만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