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 저/조원규 역 | 들녘 | |
책이 그렇게 위험한 존재일 수 있었다니...
한 구석에 꽂혀있는 책을 꺼내려다 넘어져 다리를 부러뜨릴 수도 있고, 높이 꽂힌 책더미가 떨어지는 바람에 그 책에 머리를 맞고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고, 책에 몰두한 채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점점 책에 탐닉해 들어가 백지장처럼 하얘진 얼굴로 서재에 박혀 세상으로부터 고립될 수도 있고, 한 권 한 권 사들인 책에 잠식당해 온 집안을 가득 채운 책에 포위된 채 삶의 공간을 잃을 수도 있다.
귀한 책 한 권을 구하기 위해 재산을 탕진할 수도 있고, 그렇게 모은 책들을 정리하고 그 서지목록을 작성하는데에 심혈을 기울이느라 삶의 시간을 놓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은 부산한 생활속에서 한 두시간쯤 모든 것을 잊은 채 고요히 내 안으로 빠져들 수 있는 '인간적인 시간'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푹신한 소파에 묻혀, 혹은 방바닥에 편안히 배를 깔고서 마침내 손에 넣은 정말 읽고싶었던 책의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그 행복을 무엇에 비할까.
이 소설은 책에 집착해 책에 먹혀버렸다가 벗어난 한 사람의 일화를 통해 그런, 책에 대한 애와 증을 보여준다.
이야기가 진지한 듯 하면서도 어찌나 능청스럽게 웃긴지, 손바닥만한 책을 들고 뚝딱 읽으면서 얼마나 낄낄댔는지 모른다.
책읽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굳이 책을 소유하려는 욕심은 별로 없으니 소설 속 주인공같은 파국을 맞는 일은 없겠지.
집안을 가득 채운 이만권의 장서를 관리하느라 골몰하다, 책을 분류했던 서지목록을 화재로 잃고, 다시 작성할 엄두를 못낸 채 거의 반쯤 미쳐 어느 구석진 바닷가에 그 책들로 집을 지어버린 사람. 시멘트 범벅이 되어 아무런 맥락도 없이 제멋대로 벽이되고 바닥이 되고, 창틀이 되어버린 그 책으로 된 집에서 어떤 책 한 권을 찾아내려 다시 그 집을 부순 사람. 그건 어떤 은유인가.
나는 어쩐지 소설 속 그 집이 보고싶다.
다 부서져 부서진 벽으로 흰 거품이는 바닷물이 반쯤 차들어온다는 그 집.
천장은 기왕에 무너져내리고, 해골처럼 책의 잔해가 시멘트 속에서 비죽비죽 비어져 나온 그 집 창틀에 걸터앉아 발목을 반 쯤, 집안까지 들어온 바닷물에 담그고, 파도에 찢겨진 책의 갈피들이 이리저리 쓸리고있는 바다를 보고싶다.
그렇게 다리를 건들거리며 아무 생각없이 바다를 바라보노라면 그냥 무언가 다 알았다는 기분일 것도 같은데...
'종종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언제 들춰볼지 알 수도 없는 책을 왜 그리 보관하고 있느냐고. 전에 한 번 읽었을 뿐 지금 내 독서 취향과는 동떨어진, 그리고 몇 년이 지나도 다시 펼칠 일이 없을 듯한, 아니 어쩌면 영영 읽지 않게 될 책들 말이다. 하지만 내가 나의 몇 안 되는 유년의 기억 가운데 하나인 <야성의 부름>이나 소년 시절의 눈물을 담은 <조르바> 또는 <25시>처럼 내 책장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책들과 어떻게 그리 쉽게 결별할 수 있겠는가. 그 책들은 완성된 전체였고, 충성스러운 헌신으로 서로를 묵묵히 버텨주고 있었다.
책 한 권을 버리기가 얻기보다 훨씬 힘겨울 때가 많다. 우리는 궁핍과 망각 때문에 책들과 계약을 맺고, 그것들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지난 삶에 대한 증인처럼 우리와 결속되어 있다. 책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안 우리는 축적의 환상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책을 읽을 때마다 정신적인 소득을 기입하듯 해와 달과 날을 기록하곤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첫장에 자기 이름을, 공책에 빌려갈 사람의 이름을 적고 난 연후에야 책을 빌려주곤 한다. 공공도서관처럼 도장을 찍고 소유자의 카드를 꽂아놓은 책들도 본 적이 있다. 책을 잃어버리는 걸 달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차라리 반지나 시계, 우산 따위를 잃는 편이, 다시는 읽지 않더라도 낯익은 제목만으로도 우리가 과거에 누렸던 감정을 일깨워주는 책 한 권을 잃는 것보다 훨씬 낫다.'
'서가를 만드는 사람은 인생 전체를 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거든요. 결코 아무 계획없이 모아놓은 책들이 아니란 뜻입니다.....당신은 그저 책들이 서가에 모여서 저절로 불어나는 것 같겠지요.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런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사실은 서가의 주인이 특정한 주제를 선택하고 시간이 지나면 온전한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게 더 나은 비유일 수도 있겠네요. 말하자면 우리는 흔적이 남는 하나의 여행을 마치는 셈이지요.'
'그러나 나는 일개 독자에 지나지 않아요. 나는 이미 완성된 형태의 풍경 속을 여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끝이 없어요. 나무들은 이미 묘사되어 있습니다. 바위와 나뭇가지에 스치는 바람, 그 나뭇가지를 향한 그리움과 나무 그늘 속의 사랑 같은 것들 말입니다. 내게 허락되지 않을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나는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 인간적인 시간을 누리는 것보다 더 커다란 행복을 알지 못해요. 내게 닫혀있을 그 시간 속에서 말입니다. 겨우 한평생 사는 것으로 그 시간을 제대로 알아내기란 어려울 겁니다. 보르헤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서가란 시간 속으로 난 문입니다.......나는 그저 책을 열어 펼치는 것 자체를 즐깁니다. 행간이 적절하게 잘 짜여져 있어 흠잡을 데 없는 여백을 음미하는 것, 생일 때마다 뜯지 않고 꽂아둔 책을 개봉하는 일이 기쁩니다.'
'이를테면 나는 괴테를 읽을 때 바그너의 음악을 틀어놓지요. 보들레르를 읽을 때는 드뷔시를 틀고요. 독서라는 여행에 늘 함께 하는 것들이지요. 자신있게 말하건대 그렇게 하면 즐거움이 더욱 커진답니다. 어쩌면 아실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책을 읽을 때 거의 진동이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철자들을 발음하곤 합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언제나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기가 악보를 연주하듯이 목소리는 읽는 행들을 연주합니다. 단어와 문장들에서 음과 멜로디를 이끌어내는 거지요. 그래서 낮게 음악을 깔아주면 고막 안 깊은 곳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스피커에서 나온 음악의 조화로운 화성이 이루어집니다............또 우리는 독서의 즐거움을 촛불로 더욱 고상하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물론 그때 읽을 책들은 전기가 발명되기 이전 것들이어야 합니다. 이 생각을 이상하게 여기실지 모르지만, 어떤 유화를 볼 때 촛불을 켜놓으면 완전히 달라보인다는 걸 알게 됩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공조명이라도 이에 비할 바가 못되지요. 촛불 아래 새로운 그림 한 폭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음영은 생생해지고 마치 물감과 기름으로 만들어진 빛이 실내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지요. 공간이 넓어지면서 우리는 상상해보지 못한 차원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책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는 훌륭한 그림과 다름없어요. 작은 자음과 모음들에는 독자적인 리듬과 구성의 원리에 따라 쉼없이 만들어내는 형상과 선의 유희가 담겨있지요. 그러니까 본문의 모양, 글자의 크기, 좌우상하의 여백, 종이의 질, 양 끝이나 가운데에 매겨지는 쪽번호처럼 전체를 이루는 자잘한 모양새들을 어느 누구도 무시해선 안 됩니다.하얀 새 책이라도 촛불에 비춰보면 얼마나 고풍스러운 맛을 자아내는지! 그 책은 이내 엄청난 매력을 발산합니다. 그럴 때 통로를 살펴보는 즐거움이란!'
'한마디로 그곳은 신이 떠나버린 세상의 끝입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모든 생각을 비우고 다른 인간이 되고 싶다면 아마 그런 곳을 택할 겁니다. 고독 때문에 죽을 것 같고 개처럼 처량한 기분일 때나 자신과 대면하고 싶을 때라면 그런 곳을 찾아가야 하겠지요. 애매함도 방해도 마취도 위안도 없는 곳. 황량한 자연 한가운데 그늘이라고는 없는 곳. 세상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든 하늘 밑에서 밤이 끝없이 낮처럼 이어지는 곳...'
'나는 살아오면서 덜그럭대는 탁자를 책으로 받치거나 책을 탑처럼 쌓아 천을 덮어 보조탁자로 쓰는 걸 많이 보아왔다. 사전류는 사전의 용도보다는 구겨진 물건을 눌러 펴는데 쓰일 때가 많고, 겉멋 부리기로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은 사실 편지나 돈 그리고 은밀한 비밀을 감춰두는 장소일 때가 많다. 이렇게 열거한 경우들을 그 누구도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만이 책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 있다.
화병이 깨지고 커피포트나 텔레비젼이 망가져도 책은 끄떡없다. 책은 소유자가 고의로 책장을 찢어내거나 불태우기 전에는 망가지지 않는다. 군사독재가 자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책과 목숨을 놓고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당시 책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고발했고, 그들의 인생을 파괴시켰다.
일이백 년 또는 이천 년의 세월을 견뎌내는가 하면 모래 속에서도 살아남는 저 내구성 있는 물체와 인간의 관계는 결코 무해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옳다. 저 부드럽고 쉽게 소멸되지 않는 책이라는 사물은 인간과 숙명적으로 맺어져 있다고.'
'나는 택시기사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채찍처럼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을 헤치며 움막을 향해 걸어갔다. 잿빛으로 요동치는 바다가 탐욕스럽게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요오드가 섞였을, 걸쭉해 보이는 거품다발이 해안을 핥다가 길쭉한 포도알 모양으로 스러지며 더러운 해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바람은 부서진 파도조각을 마구 휘날리며 모래와 플라스틱 쓰레기와, 떠다니는 작은 나뭇조각 따위를 휘감아 올렸다. 갈매기들은 죽은 바다표범 위에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비바람에 시달린 움막은 문과 창틀이 부서지고 벽만 남아 해골 같은 몰골로 엄청나게 훼손되어 있었다. 바람에 기울어지고 부스러져 나뒹구는 벽의 잔해, 시멘트 조각과 딱딱하게 늘어붙은 조개껍질들, 검은 이끼, 햇빛에 바싹 말라버리거나 바닷물에 흠뻑 젖은 종잇장들, 물에 씻겨 도무지 읽을 수 없는 철판 인쇄물들, 여기에 백과사전의 뒷장이 있는가 하면, 저기엔 가장자리가 파도처럼 일어나 하얗게 부풀어오른 소책자 따위가 눈에 띄었다.
문과 창문 가까이에서 나는 모래에 반쯤 묻혀 있는 우이도브르, 네루다와 바르톨로메를 발견했다. 로렌스는 마로사 디 조르지오와 함께 단단한 벽돌로 접착되어 있었다. 또 엘리엇과 로르카가 눈에 띄었고, 스위스의 역사가인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달팽이 문양의 조각과, 석회가 묻어 알아보기 힘든 팔리에르의 작품도 보였다.
책들은 벽이 되어 파묻혔고 몹시 파손되어 온갖 더러운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책들은 흉측한 시체들처럼 모래 바닥 여기저기에 삐죽삐죽 드러나 있었다. 철자들, 단어들, 종이, 씻겨져 내려간 잉크 자국, 벌레가 구멍을 낸 책 겉장들,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를 횡단하며 수없이 뚫어놓은 작은 터널들.
......세계의 문학작품들이 모래더미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품위를 잃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책들은 묶이고 그을린 채 아직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책의 각 쪽마다 어떤 재능있는 작가가 해냈을 것보다 더 깊은 구멍이 파이고 딱딱한 석회가루가 입혀졌다. 책의 표지는 빛을 찾는 눈처럼 밖으로 드러났다가 다시 모래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책들이 쌓여있는 모래언덕에서 벗어나 초라한 오두막 쪽으로 걸어갔다. 창문과 문이 다 떨어져나가고 일그러진 돌쩌귀와 텅 빈 직사각형 뼈대만 남은 그 광경은 서글픈 분위기를 자아냈다. 바람은 짚으로 만든 구멍 숭숭 난 지붕을 드나들며 나직한 휘파람 소리로 울고 있었다.....해변에서 날마다 한 조각씩 파괴되어 떠다니는 이 모든 시체들...종이란 자기 몸에 단어가 인쇄되기를 무모할 정도로 고집스럽게 기대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인쇄업자와 디자이너들, 활자 작업자들, 타이피스트, 편집자들, 작가들, 배본사들, 제본업자, 잉크만 낭비하는 엉터리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서문 집필자, 박식한 기억의 해석자들이 한데 힘을 모아 한바탕 난리법석을 떨며 책을 만들어냈지만 결국에는 나직한 파괴음을 내며 마치 거리의 야자수처럼 커다란 바다의 심연에 삼켜지고 말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바다가 있었다. 광포하고도 맹렬하게 마치 물어뜯을 듯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파도와 피투성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바다표범들, 알바트로스들은 그 속에 주둥이를 박고 있었다. 해초내음이 떠도는 그곳에 모래돌풍이 휘몰아쳤고, 해안엔 얼마나 오래 표류했을지 모를 나무다발이 놓여있었다. 이런 곳에서 책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저 모래에 파묻혀 어둠 속에서 침식되어가고, 때때로 난파선의 잔해처럼 문득 한 번 모습을 드러내는 일 외에.
우리, 즉 책과 나와 제 자신의 뜻대로 땅 위에 존재하겠다고 대양의 더러운 거품에서 빠져나온 모든 것들을 기다리는 운명은 오직 하나이다. 다른 어떤 것일 리가 없다. 그래도 그 유희가 느릿하고 긴 기다림으로 이루어진다면 운명은 아직 기다려줄 것이다. 하긴 그런 이유로 누군가는 철자들을 넘겨주길 주저할 것이다.'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초프라 (0) | 2006.07.08 |
---|---|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장석남 (0) | 2006.06.29 |
빛의 힐링 (0) | 2006.05.17 |
산 자의 길-마루야마 겐지 (0) | 2006.04.18 |
정신의 탐험가들-츠바이크 (0) | 2006.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