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304 |
여린 얼굴... 햇빛보다는 빛드는 환한 그림자, 불꽃보다는 그 온기, 파도로 치면 살그머니 다가와 발목을 간지르는 서해의 파도, 어디서 오는지 모를 산들바람, 해뜰 녘 해질 녘의 여명, 들릴 듯 말듯한 허밍, 혼자 노는 아이, 그 이마의 푸른 그늘, 웃음보다는 미소, 혹은 눈에 어린 눈물...그의 시는...
봉평의 어느 시냇물을 건너며
저 햇빛의 찬란함 위로는 이편의 모든 것이 다 손잡고 맨발로 건너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건너보면
햇빛은 뒤로 물러나며 조그만 징검돌을 올리고
징검돌은 기우뚱 무슨 말인가를 건네기도 하는 것이다
봄이 오는 길도 그러하였고
너에게로 가는 길도 그러하였다
시냇물은 발랄하고
기러기가 날아간 쪽 하늘빛이 아직은 좀 남아 있고
새로 생긴 저녁
보고 싶어도 참는 것
손 내밀고 싶어도
그저 손으로 손가락들을 만지작이고 있는 것
그런 게 바위도 되고
바위 밑의 꽃도 되고 蘭도 되고 하는 걸까?
아니면 웅덩이가 되어서
지나는 구름 같은 걸 둘둘 말아
가슴에 넣어두는 걸까?
빠져나갈 자리 마땅찮은 구름떼 바쁜
새로 생긴 저녁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저 새로 난 꽃과 잎들 사이
그것들과 나 사이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무슨 길을 걸어서
새파란
새파란
새파란 미소는,
어디만큼 가시려는가
나는 따라갈 수 없는가
새벽 다섯 시의 감포 바다
열 시의 등꽃 그늘
정오의 우물
두세 시의 소나기
미소는,
무덤가도 지나서 저
화엄사 저녁 종 지나
미소는,
저토록 새파란 수레 위를 앉아서
나와 그녀 사이 또는
나와 나 사이
미소는,
돌을 만나면 돌에 스며서
과꽃을 만나면 과꽃의 일과로
계절을 만나면 계절을 쪼개서
어디로 가시려는가
미소는,
겨울날
1
살구나무에 잎이 다 졌으니 그 잎에 소리 내어 울던 빗발들 어쩌나 그래서 눈이 되어 오나?
진눈깨비 되어 오나?
살구나무 빈 가지의 촘촘한 고독 사이를 눈은 빠져내려서
지난 한해의 촘촘한 고독 사이를 눈은 빠져내려서
지난 한해의 빗소리 같은 것도
덮고 있는데
잊고 지낸 젯날 같이
설운
하루 한낮
매화꽃을 기다리며
매화분 하나를 구해 창가에 두고는
꽃봉오리 올라오는 것 바라보니
피멍 든 듯 붉은 빛이 섞여서
겨우내 무슨 참을 일이 저렇듯 깊었을까 생각해본다
안에서는 피지 마 피지 마 잡아당기는 살림이 있을 듯해
무언가 타이르러 오는 꽃일지 몰라
무언가 타이르러 오는 꽃일지 몰라
생각해본다
집은 동향이라 아침 빛만 많고
바닥에 흘린 물이 얼어붙어 그림자 미끄럽다
後日, 꽃이 나와서, 그 빛깔은
무슨 말인가
무슨 말인가
그 그림자 아래 나는 여럿이 되어 모여서
그 빛깔들을 손등이며 얼굴에까지 얹어보는 수고로움
향기롭겠다
石榴나무 곁을 지날 때는
지난 봄에는 石榴나무나 한 그루
심어 기르자고, 봄을 이겼다
내년이나 보리라 한 꽃이 문득 잎사귀 사이를 스며나오고는 해서
그 앞에 함부로 앉기 미안하였다
꽃 아래는 모두 낭자한 빛으로 흘러 어디 담아둘 수 없는 것이 아깝기도 했음을,
그 욕심이, 내 숨결에도 지장을 좀 주었을 듯
그중 다섯이 열매가 되었는데,
열매는 내 드나드는 쪽으로 가시 달린 가지들을 조금씩 휘어 내리는 게 아닌가
그래 어느 날부터인가 석류나무 곁을 지날 때는
옷깃을 여미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그중 하나가 깨어진 채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안팎을 다해서 저렇게 깨어진 뒤라야 완성이라는 것이, 위안인, 아침이었다
그 곁을 지나며 옷깃을 여미는 자세였다는 사실은 다행한 일이었으니
스스로 깨어지는 거룩을 생각해보는 아침이었다
절벽
바다엘 가네
꽃 진 꽃밭
당신 소매 끝으로 지우고
일어설 만하네
바다엘 가네
흰 돌 삶아먹고 사는 이 그려
서른 번도 세고
아흔 번도 세는
파도 소리
그래서는
눈에 머금던 꽃 빛들
다 풀어주리
바다에
바다엘 가네
하늘 끝 청명하네
흰 꽃
꽃 핀 배나무 아래
나이 어린 돌들과 앉아
'너는 희구나'
'너는 희구나'
앉아
'너는 희구나'
그렇게 희고,
또 희고도
정신 놓지 않고
허튼 흰빛 하나 없이
다섯 살에 깨친 글자들처럼
발등에도, 발톱 위에도 놓아보는
흰 꽃,
흰 꽃
연못
---山居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바위와
바위와
구름과 구름과
바위와
손 씻고
낯 씻고
앉아 있었다
바람에
씻은 불처럼
앉아 있었다
연못은 혼자
꽃처럼 피었다 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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