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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체임버홀이 개관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구경해야할텐데 하고 생각하던 차에, 김선욱이라는 연주자이름은 처음 들어보지만 레퍼토리가 하도 풍성해 가보기로했다.
세종체임버홀은 새로 만든 티 폴폴 나는, 아직은 설익은 과일같이 풋기 어린, 500백석이 좀 안되는 규모의 아담한 공간.
꾸밈없는 소박함이 마음에 든다.
제일 싼 표를 산 탓에 자리는 2층의 박스석. 그런데 예술의 전당 합창석도 그렇지만, 제일 싼 자리가 때로 로얄석을 능가하기도 한다.
자리를 찾아가보니 연주자의 바로 코 앞. (연주 내내 연주자의 옷깃에 똑 똑 떨어지는 땀방울까지 다 보였다.) 마이크를 통해서 들리는 소리뿐 아니라 피아노 소리가 생으로 들리는 자리니, 이런 행운이...
예술의 전당 합창석도 그렇지만, 여기도 자리는 거의 로얄석 수준이지만 본 객석과 거의 마주봐야해 약간 민망한 위치인데, 게다가 공연 중에도 객석의 조명이 제법 밝아 관객들의 얼굴이 다 보인다.
그렇게 얼굴들이 다 보이니 연주자가 연주에 집중할 수 있을까, 하던 나의 걱정은 아마도 기우였나보다.
첫 곡 슈베르트를 연주하는데 단조의 멜로디에 대번에 눈물 핑 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의 공연이라도 공연 내내 불안하기도, 아니면 너무 평이해 지루하고 자꾸 딴 생각나기도 하는데, 연주가 제법 흡입력이 있다.
체임버홀이라는 아담한 공간이어서인가, 바로 코 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있어서인가, 아니면 연주가 좋아서인가...
젊은 연주자답게 자신만만하고 활기차면서도 표현이 풍부한 연주였다.
멜로디가 슬퍼지면 마음도 같이 슬퍼지고, 멜로디가 명랑해지면 마음도 같이 웃고...
슈베르트는 눈물나게 아름답고, 스크리야빈에서는 왠지 전에 본 영화 '클림트'에서 깨져 파편이 돼있던 거울조각들이 자꾸 생각나고, 브리튼은 모던한 느낌이고...
색깔이 다른 곡들이 계속 이어지는데 색다른 느낌.
김선욱이라는 연주자에 대한 인상으론 그의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볼 때 열정적이고 드라마틱한 곡들이 어울릴 것 같은데 의외로 베토벤 소나타 연주가 귀에 쏙 든다. 평소에 별로 안좋아하던 곡인데...
담담한 아름다운 멜로디들, 예쁘게 만들어진 동그란 음들이 비누방울처럼 공중을 날아다녔다.
이어서 아마도 회심의 역작, 리스트...역시 기량을 맘껏 뽐내는 듯한,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열정적인 연주.
마치 또 하나의 본 레퍼토리인 것 같은 앙콜곡까지(멜로디는 귀에 익은데 곡명은 모르겠다) 이만하면 만족이야 하는 포만감이 드는 좋은 공연이었다.
가끔 건반을 떠나 환상을 보는 듯, 꿈을 쫓는 듯 허공을 더듬던 그의 하얀 왼손이 참 어여뻤다는 생각.
귀로 들을 때 때론 눈에 보이는 것들이 방해된다.
박스석 뒤로 제법 넓직한 마루공간이 있던데 거기에 돗자리라도 깔고 누워 눈 감고 연주를 들었으면 아마 참 좋았을 것...
집에 돌아와 인터넷검색을 해보니, 아니 제법 연주자의 풍모가 보이던 이 녀석, 만18세, 스무 살도 안된 청소년이라네.
앞으로 어떻게 커 갈지, 어떤 연주자로 성장해 갈지 정말 궁금해진다.
어제는 피아노의 날이었나보다.
공연 전 들른 교보문고에서 청음기에 끼워져있던 폴리니가 연주한 쇼팽의 녹턴에 필이 꽂혀 사들고 와서는 밤새 듣고 오늘도 하루종일 귀에 매달고있었다.
아마 오늘 밤에도 나의 자장가가 되어 줄 것.
그렇게 악기를 만들고, 수많은 음의 파장 중에 어떤 어떤 파장을 따로 골라 음악이란 걸 만들고, 그걸 연주하고, 들으며 또 즐기고 기뻐하고...
인간이라는 동물, 그럴 때 보면 간혹 이쁜 구석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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