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 잔 속에 달이 뜨네-지운

바다가는길 2006. 2. 12. 22:07

-차수행은 혀와 맛이 만나는 세계를 여실히 알아차림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이 맛의 세계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 생활 전반에서 이루어질 때 삶이 온전히 깨어있게 됩니다.

한 잔의 차공양으로 함께 하는 삶이 오롯이 드러납니다. 구름 걷히면 밝은 달 드러나듯이, 그렇게 자신의 자성을 보는 깨어 있는 삶으로 거듭 나십시오. 찻잔 속에 마음의 달이 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잔의 차 마심이 그대로 우주의 몸짓이요, 생명살림의 아름다운 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차마시는 행위 자체가 항상 수행의 방편이면서 차마시는 그 자리가 수행도량입니다.

멀리서 진리를 찾으려 하지 말고 일상의 작은 일에 주의하십시오.

주변에서부터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제나 첫맛을 감지하듯 하는  생활이 되십시오. 일상행활에서 적용되고 활용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잠에서 깨듯이 늘 깨어 있는 삶이 됩니다-

 

 

'차 맛의 본성은 상호의존적인 연기이며, 실체가 없는 공이며, 유도 무도 아닌 중도이며, 또한 한 마음이라 합니다.

 

차름 맛봄에서 차맛을 싫다고 하여 성내는 것은 차맛을 자아라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일면, 차맛을 내가 맛본다는 점에서 '내 것'으로 차맛을 자아 안에 포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차맛의 본성을 깨달으면 이러한 것이 모두 사라져 차맛이라는 올가미에 걸리지 않습니다. 자연히 차맛에 집착해 일어나는 괴로움에서도 벗어납니다.

 

이것은 단지 차맛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느낌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사는 감각에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차맛의 본성이란 곧 모든 존재의 본성이므로, 차맛의 본성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모든 존재의 본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가운데 나라고 할 만한, 실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너, 그리고 대상을 분별하지 않습니다. 무분별로 인식하기에 실상은 나와 너를 또는 대상을 분리하지도 않습니다.분리되지 않는 전체의 한 덩어리로 인식하기에 주객이 둘이 아닌 불이이며,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허공과 같이 비어 있는 모습이 공이며,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도 사라지는 상호의존과 공존의 열린 세계, 즉 연기의 하나로 어우러진 삶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일체의 모든 법을 여실히 아는 것을 지혜라 하며, 이 지혜는 모든 세계의 실상을 바로 관통하므로 이 세상은 그 무엇도 이것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무아이며 무상으로 주객과 자타가 사라진 연기인 세상은 공한 한 모양일 뿐입니다.

이 하나를 알면 세계를 열려있는 그대로의 하나로 인식하게 되며, 차별된  세계의 갖가지 모습도 본질을 하나로 꿰뚫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정되고 분별된 인식은 지혜로써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와 나의 것을 들어 차별함으로써 갈등을 낳고 서로를 소외시키는, 닫힌 마음에서 비롯된 온갖 고통을 여의고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의 참다운 모습을 찾으려 하거나 현실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할 때, 삼세와 세계의 실상을 관통할 수 있는 지혜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힘입니다.'

 

 

'한 잔의 차를 마시고 그 맛을 아는 것은 곧 현재의 자기 존재의 본질을 통찰하는 것이며, 동시에 일상생활 속에서 그대로 사람과 자연 등 모두가 함께 하는 연기의 진리를 체득하는 것입니다.'

 

 

차를 통한 수행법.

일상의 하나 하나가 수행의 대상이 안되는 것이 없다지만, 특히 스님들이 강원에서 다회를 하며 차를 통한 수행에 대해 묻고 답했던 것들을 정리한 모양이다.

알면서도 실천이 안되는 것들.

차는 마시지않지만 그 대신 커피마실 때 만이라도 마음을 집중하도록 노력해볼 것.

 

 

법공양 간.